박유미는 강릉에서 편집숍 ‘오프랑’을 운영한다. 아래층엔 남편의 프랑스 가정식 레스토랑 ‘썸머키친’이 있다. 레스토랑 브레이크 타임에 맞춰 매장을 찾았다. 박유미는 강릉에 살게 된 여정을 OU에게 신나게 풀어줬다. 그와의 대화에는 많은 부분에 ‘자연스럽게’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단어는 어떤 맥락에도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듣다 보니 그의 가족이 강릉에 자리를 잡은 건 어쩌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박유미, @5francs_
김진권, @summerkitchen
남편과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건 어때요?
처음엔 아예 주방에서 같이 일을 했어요. 그러다 제가 2층 공간을 맡게 되었고, 지금은 서서히 떨어져 나오고 있어요. 요즘엔 밖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요.
밖이라면 이 건물 밖이요? 밖에서 뭘 하세요?
최근에 저희 부부가 어떻게 하면 좋아하는 이 일을 여유를 가지고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여기서 직접 뭘 만들거나 서비스하는 것보다 뒤에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으면 해서 밖에 나가 산책도 하고 서핑도 해요.
저는 서핑을 한 번도 안 해보고 낭만만 안고 있어요. 서핑은 어떤 활동인가요?
이런 얘기를 누구한테 할 만큼의 실력자는 아니지만, 제 감상을 말해 볼게요. 서핑은 자연과 나, 둘의 놀이 같은 거에요. 보드 위에서 떨어지더라도 큰일이 나지 않을 거라고 자연을 믿고 몸을 던져야 즐길 수 있어요. 어떤 기술을 성공하겠다는 의지 같은 건 내려놓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바다와 그저 어울리면 돼요.
서핑은 언제부터 했나요?
2014년인 것 같아요. 친구들이랑 광복절에 양양에 놀러 갔다가 처음 하게 됐어요. 오래 한 거에 비해 실력이 그럭저럭 이라 이런 질문 받으면 대충 얼버무려요.
앗, 제 질문이 별로였네요. 예를 들어 캠핑도 언제부터 했는지 물어보면 괜히 부담스럽잖아요.
캠핑 8년 차라고 하면, 연차에 맞춰 대단한 장비나 실력을 기대하게 되잖아요. 제가 생각하는 서핑은 선수처럼 기술을 연마하는 것보다 분위기와 환경을 즐기는 의미가 더 커요. 그래서 제 실력이 좀처럼 늘지 않은 거겠죠? 강릉에 정착하느라 서핑에만 집중할 여유도 별로 없었고요.
강릉 바다 이전에 다른 곳에 있었군요.
호텔에 10년 넘게 있었어요. 외국어 배우는 걸 좋아해서 중국어와 프랑스어를 전공했는데, 공부를 더 하고 싶어 고민했어요. 어려서부터 유럽 문화에 호기심이 많았고, 사람을 좋아하고, 먹고 마시는 일에도 관심이 많으니 호텔 공부를 해보지 싶었어요. 큰 고민 없이 결정한 데 비해 참 즐거웠어요. 프랑스 남부 도시에서 호텔경영학 석사를 마치고 파리에서 인턴십과 취업을 했어요.
오프랑의 이 분위기가 그때 만들어진 거군요.
그때 제가 좋아하던 것들을 가져다 놓았어요. 1층에 프랑스 가정식을 먹으러 온 손님이 찾을 만한 물건도 고려했고요. 5프랑짜리 동전처럼 작은 가치도 소중하게 여기겠다는 뜻을 담아 가게 이름을 지었어요.
매장 아이템은 어떤 기준으로 골라 왔나요?
제가 생활 속에서 중요하게 느낀 물건을 가져다 놓았어요. 유행과 맞물린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어요.
물건이 중요한지는 어떻게 느껴요?
있을 때랑 없을 때가 생활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봐요. 없으면 확 달라지는 게 있어요. 그런 걸 사람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어요. 이왕이면 불놀이하듯 잠깐 보고 소비하는 게 아니라 지속가능한 걸로요. 하지만 그건 제 철학이니 강요하고 싶진 않아요. ‘자연을 지켜야 하니 이런 물건을 써야 합니다’ 라 말하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란 생각이 들어서요. 자연스럽게 마음이 끌릴 수 있도록 그중에서도 보기 좋고 예쁜 아이템으로 골랐어요.
지속 가능함을 생각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강릉의 바다에서 서핑하고 호숫가를 걷다 보니 그렇게 연결이 되었어요. 처음부터 자연이 최고야, 서핑 멋있어, 그런 마음은 아니었는데, 좋아하는 마음이 차근차근 이어져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좋아하는 마음이요?
뭔가를 진정으로 좋아한다면 예의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도 서로 좋아하면 감싸고 보호하고 아껴주잖아요. 자연에게도 똑같아요. 처음에는 오프랑에서 패션 아이템을 주로 팔았어요. 옷이 많았죠. 예쁘고 보기도 좋았지만, 제가 소재나 짜임 방식을 잘 아는 게 아니니까 마음이 영 불편했어요.
왜요?
정말 이걸 소개하고 싶은 게 맞나? 의문이 들었거든요. 나도 잘 모르는 걸 남에게 설득하려니 어색하고 힘들었어요.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있는 걸 찾아야겠더라고요.
그 과정을 거쳐 여기 오게 된 아이템이 궁금해요.
이전에도 향기에 관심이 많았는데, 서핑 샵에서 만난 친구와 같이 조향 공부를 했어요. 돈을 모아서 배우고 향기도 만들었죠. 연구 끝에 ‘르 비앙네르트’라는 오프랑의 캔들 라인을 출시했어요. 소이왁스, 초 등 자연스러움을 거스르지 않는 정도의 빛과 향을 가진 것들을 팔아요. 같이 공부한 그 친구는 지금 오프랑의 매니저를 맡고 있어요.
초의 재료인 밀랍도 친환경으로 알고 있어요.
맞아요. 자연에서 나오는 거고,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거에요. 중국 밀랍을 많이들 받아 쓰는데, 저희는 한국 것만 사용하고 있어요. 중국 것도 그곳의 벌이 자연스럽게 만든 거지만, 가까운 곳의 물건을 쓰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요. 우리나라에 양봉하는 사람으로부터 남은 밀랍을 사서 쓰고 있어요.
접시에 그려진 이 여우는 뭐예요?
저희 딸이 다섯 살 여름에 여우에 꽂혀서 여우 그림을 엄청나게 그렸어요. 집이 온통 여우로 가득했죠. 그때 그 여우에요. 1층에선 썸머 키친의 식사를 담아내고 있고, 2층에서는 직접 사갈 수 있게 판매하고 있어요.
딸 이름이 도이, 맞죠? 어떤 아이예요?
처음엔 저랑 똑 닮은 아기라고 생각했어요. 요즘엔 아빠랑 엄청 닮았어요. 저처럼 표현하는 것도, 새로운 걸 해보는 것도 좋아하면서 동시에 아빠처럼 안정을 추구하고 차분한 면도 있어요. 밝고 귀엽고 다정하고 재미있고 의외로 생각이 많은 일곱 살 아이예요.
일곱 살 도이와는 주로 어떤 시간을 보내나요?
아빠가 주방에서 요리하는 주말이나 저녁 시간엔 저랑 같이 시간을 보내요. 거의 밖에서 놀아요. 그래서 아이가 늘 해에 그을려 있어요.
같이 서핑을 하나요? 어려서부터 하는 아이도 있지만, 아직 도이는 바닷가에서 물놀이하고 모래 놀이해요. 제가 서핑하러 가는 곳에는 제 또래의 아기 엄마가 많아요. 돌아가면서 서핑을 하고 아이를 봐줘요. 처음부터 숍을 고를 때 어린아이도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분위기를 찾았어요. 그래서 서핑을 같이하지 않아도 편안한 마음으로 놀 수 있어요.
같이 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물론 있죠. 그렇다고 일부러 보드에 아이를 올려서 파도 타는 걸 알려줄 생각은 없어요. 트라우마가 생겨서 아예 바다에 마음을 닫아 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보드를 들고 파도에 몸을 던지고 흥분된 표정으로 뭍으로 나왔다가 또 신나게 바다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계속 봐 왔으니까 언젠간 자연스럽게 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도이가 언제 어디서라도 파도를 확인할 줄 알고, 어떤 파도를 즐길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요.
아이와 함께하기 좋은 강릉의 장소 하나만 소개해 주세요.
경포 호수요. 경포 호수 주차장에서 뒤쪽으로 들어가면 철새가 쉴 수 있게 만들어 둔 조그만 호수가 있어요. 주변에는 겨울까지 열매가 매달려 있는 나무가 심겨 있고요. 사람 한 명이 지나갈 수 있는 정도의 뒷길이 있는데, 여기가 참 좋아요. 겨울에 코트 입고 커피 한 잔을 들고 이 길을 걸으면, 여기가 도대체 어느 나란지 모르게 돼요. 곰곰이 생각에 잠기기에 좋은 장소에요. 자신도 여기에 있는 내가 멋있게 느껴지고, 만족스러운 생각이 자꾸 떠오르거든요.
앞에서 바다 얘기만 해서 바다를 생각했는데 호수가 나오네요. (웃음)
경포 호수 되게 넓고 관리가 잘 되어 있어요. 이 호수는 공룡이 살던 때도 있었대요. 그때도 새들이 남쪽 나라로 날아가기 전에 여기서 배를 채우고 잠깐 쉬어갔다던데, 그 의미를 지금까지 지키고 있는 강릉이 정말 좋아요. 멋있지 않나요? 뭐랄까, 포틀랜드 같아요.
저는 강릉도 포틀랜드도 안 살아봐서 모르겠어요. 경포 호수에서 포틀랜드를 느낀 지점이 있나요?
저도 포틀랜드 안 가봤어요. (웃음) 제가 서핑을 시작한 무렵에 <킨포크>가 활동했어요. 유튜브에 영상이 올라왔는데, 그 배경이 포틀랜드였어요. 그 동네 사람들이 자기 삶과 자연을 균형 있게 즐기는 장면을 보는데, 참 좋더라고요. 그때 제가 호텔 일에 되게 지쳐 있었어요. 미팅이나 컨벤션을 유치하기 위해 큰돈이 오가고, 여러 부서와 동시에 소통하고, 공격적으로 밀어 붙여가며 실적을 내는 게요. 일이 즐거워도, 이렇게 치열하게 계속 살 수는 없을 것 같더라고요. 영상 속 포틀랜드 사람들은 의사든 바리스타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해요. 보통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매달리게 되잖아요. 그러다 보면 진이 빠지고요. 근데 그 사람들은 지적이고 열정적이면서도 자연스러웠어요.
강릉이 그 느낌인가요?
한때 진짜 포틀랜드로 이주할 생각도 있었어요. 강릉에서 서핑하다 보니 거기까지 갈 필요가 없겠더라고요. 여기에 산도 있고 바다도 있고 제가 동경하던 포틀랜드 사람의 마음가짐도 있으니까요. 제가 마음만 먹으면 여기가 포틀랜드가 되는 거예요.
포틀랜드 이주까지 생각했군요!
그럼요. 이직 준비도 하고 있었어요. 포틀랜드에 하야트호텔이랑 나이키 본사가 있어요. 계란으로 바위 치기 하듯 나이키에 원서 넣고, 회사에는 근무지 변경을 신청해 둔 상황이었어요. 그때 도이가 생겼어요. 미련 없이 바로 그만두고 강릉에 자리를 잡았죠. 강릉은 제가 상상한 포틀랜드와 크게 다르지 않은 곳이에요.
강릉에서 가장 포틀랜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딜까요?
강릉에서는 걸어만 다녀도 문화적으로 충족되는 느낌이 들어요. 특별히 전시를 찾아가거나 강의를 듣지 않아도요. 강릉에는 크게 출세한 사람이 없대요. 문화적, 환경적으로도 충분해서 굳이 밖에 나가서 고생스럽게 성공할 필요가 없어서요. 들에 농사 잘되지, 바다에 물고기 넘치지, 산세는 웅장하지. 그게 강릉의 자연을 자랑스러워하고, 분위기를 지키는 걸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는 게 이곳 사람들의 전체적인 분위기에요. 그리고 그게 걷다 보면 여기저기서 느껴져요. 오래되어 진한 강릉의 문화가 절 계속 가르쳐줘요.
한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수도에 살아와서 강릉에서 문화적으로 목마를 줄 알았어요. 편견이었네요.
강릉에서 목마른 게 있다면, 빨리 강릉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정착한 초반에는 여기서 강릉 사람으로 인정받고, 섞여서 지내고자 하는 욕심이 컸어요. 강릉도 사람들도 정말 좋으니까요. 누가 제가 하는 일을 낯설어하면, 그게 그렇게 속상했어요. ‘아, 난 여기 섞일 수 없나 봐!’ 하면서요.
그와 오프랑의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도이가 휴대폰을 들고 엄마 무릎에 스르륵 앉았다. “엄마, 이것 봐. 집에서 키울 수 있는 뱀도 있대.” 호기심 어린 도이의 눈빛은 박유미가 강릉 이야기를 할 때의 것과 닮아 있었다. 뒤이어 썸머키친의 점심 장사를 마친 남편 김진권이 계단을 올라왔다. 분주한 점심시간을 보낸 사람 같지 않게 여유롭고 느긋해 보였다. 강릉에서 나고 자랐다는 썸머키친의 김진권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강릉 밖의 다른 데서 살아본 적은 없나요?
(진권) 잠깐 다른 도시에서 회사를 다닌 적은 있어요. 그때 말고는 계속 강릉에 있었어요. 제가 아는 강릉 밖 이야기는 아내가 해준 게 많아요. 간접 경험이 대부분이에요.
프랑스 가정식을 하고 있잖아요. 이 역시 유미 님께 이야기를 듣다가 시작한 건가요?
(진권) 아내가 이런 음식이 있다고 얘기해주면, 둘이 같이 만들어 먹고 하면서 시작했어요.
안 먹어본 맛을 내는 게 어렵진 않나요?
(진권) 어려웠죠. 아내는 먹어본 맛이지만 저는 상상해야 할 때가 있거든요. 대신 맛을 아는 사람이 옆에 있으니까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서 먹여보고 피드백을 받아 가며 찾아 나갔어요. 어머니가 식당을 오래 하셔서 요리에는 거부감이 없었어요.
어머니가 어떤 식당을 운영했어요?
(진권) 백반집이요.
(유미) 어머니가 운영하시는 곳은 강릉에 작은 바닷가 쪽에 딱 하나 있는 식당이에요. 치킨도, 도넛도 동네에서 제일 처음 만들어 파셨대요.
(진권) 삼겹살집인데, 메뉴가 정해져 있기보다 잔치 예약받으면 시장에서 제철 생선, 채소를 사다가 맞는 음식을 하고 그랬어요. 케이크도 만들고요.
(유미) 바닷 마을 오마카세죠.
진권 님이 실제로 먹고 자란 강릉의 가정식은 어떤 게 있었나요?
(진권) 어머니가 동해안에서 재료로 볶음이나 조림, 찌개를 주로 만들어 주셨어요. 오징어, 머위 볶음, 양미리 조림 이런 거 먹고 자랐어요.
프랑스 가정식과 비교하면 어때요? 뭐가 같고 뭐가 달라요?
(유미) 집밥이니까 큰 틀에서는 비슷한 것 같아요. ‘요리는 과학이다’를 모토로 솜씨를 뽐내기보다는 시간을 들여 뭉근하게 끓여내는 게 많아요. 주재료가 다르니 맛이 가장 다르고요. 처음에 썸머키친 메뉴를 정하기 위해 백방으로 레시피를 수집했어요. 프랑스 지인, 유튜브, 책 등을 찾아가면서요. 그걸 남편이 여러 버전으로 구현해 주면 제가 먹어보면서 맛을 찾는 거죠.
(진권) 연애하면서 만들어 먹는 게 마냥 즐겁고 좋았어요. 장난처럼 나중에 각자 일 정리하고 같이 레스토랑이나 차릴까? 얘기하던 게 생각보다 빨리 현실이 된 거예요. 아내가 쓰던 닉네임 ‘썸머’를 그대로 붙여 ‘썸머키친’이라는 이름으로요.
프랑스 요리라 하면 왠지 부담스러웠는데, 그렇게 들으니 맛이 더 궁금해지네요.
(유미) 이게 우리나라만의 특징인지는 모르겠는데, 유럽식 요리점이라 하면 최고급에 해당하는 음식이 주로 들어와요. 그런 가게를 운영하려면 대단한 공부를 마치고 온 사람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남은 것 같아요. 그래서 한동안 인터뷰를 피해 다녔어요. 전 강릉 토박이도 아니고, 프랑스 요리 전공자도 아닌데, 강릉에서 프랑스 가정식을 하는 게 근본이 없다고 생각할까 봐요.
아유, 근본이 뭐가 중요한가요. 다들 기쁘고 설레는 표정으로 음식을 먹던걸요.
(진권) 저희도 그 사이 생각이 많이 변했어요. 더는 움츠러든 채로 있지 않으려고요. 누가 우리의 근본과 역사를 묻는다면, 썸머키친도 우리에게도 벌써 8년이란 시간이 생겼으니까요.
인터뷰와 글, 조서형 에디터 사진과 영상, 홍두리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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