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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OU housekeeper

공원을 걷는 맨발의 댄서



이수혁은 서울에서 활동하는 프리랜서 필라테스 강사다. 움직임에 관한 공부를 하고 맨발로 공원을 걷는다. 그를 만난 날은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비가 내렸다. 마음이 철렁, 차가워지는 와중에 그가 봄 같은 파스텔톤 자켓 차림으로 나타났다. 양말을 벗고 잔디밭 위에 서서 기지개를 켰다. 길게 뻗은 두 팔만큼 수혁의 공간이 생겨났다. 서울시내 한가운데 펼쳐진 리드미컬하고 컬러풀한 수혁의 존.


이수혁, @xoooohyuk







 





날이 흐리네요. 이런 날은 좀 울적해지던데, 기운이 좋아 보여요.


푹 잤어요. 오전 11시까지 아주 늘어지게 누워있다 왔어요. 몸과 마음을 공부하면서 좋고 싫은 계절과 날씨의 경계가 사라졌어요. 이런 날에는 빗소리 들으며 쉬어가는 기분이 또 좋아요. 비가 오면 집 앞에 의자를 꺼내 놓고 앉아 있기도 하고, 방에서 창문만 열어놓기도 해요.


오늘의 옷은 어떻게 골랐어요? 재킷 사이로 푸른 계열 티셔츠와 같은 색의 양말이 눈에 띄는데요. 일부러 맞춘 거죠?


아니에요. 의도한 게 아닌데 종종 이렇게 맞더라고요.


타고난 감각 같은 건가요?


아, 그건 더욱 아니에요. (웃음) 색을 좋아해서 다양한 색깔을 집에 두지만, 또 어떤 틀 안에 있는 것 같아요. 결국 어느날 겹칠 수밖에 없는 거죠.


무슨 색 좋아해요?


핑크나 마젠타 계열의 색깔.









무채색의 대한민국 서울에서 핑크라니 남다른데요.


저도 학생 때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흰색과 검은색 옷을 입었어요. 이대로라면 나한테 잘 어울리는 색이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양하게 입어봐야겠다 싶었죠. 여러가지 색을 주변에 두는 건 제게 표현 방식 중 하나예요. 매일 기분이 다른 것처럼 매일 다른 색으로 하루를 표현하려 해요. 어느날 옷장을 열었더니 검은색 옷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예전에 기업의 연구원 일을 했다고요. 그때는 뭘 입고 출근했어요?


청바지에 티셔츠 같은 거. 그때부터 은색 신발을 신는다든지, 눈에 띄는 체크 셔츠를 덧입으며 표현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남들이 보는 저는 늘 얌전하고 조용해 보이지만, 마음속엔 나를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죠.





SNS에서 ‘지속가능한 걷기’라는 얘기를 종종 하던데, 그건 어떤 개념이에요?


우리는 매일 걷지만, 그 일을 매우 등한시해요. 출근, 퇴근, 친구 만나러 가기, 장 보러 가기 등 어디에 뭐 하러 가는지 목적만 생각하지 움직이는 과정은 고려하지 않죠. 지속가능한 걷기를 위해서는 걷고 있는 상태를 느끼는 게 중요해요. 걷는 과정에는 즐겁게 느낄만한 감각이 정말 많거든요. 발바닥이 땅을 딛는 느낌, 주변의 나무가 달라지는 모습, 즐겁게 지저귀는 새 소리를 들으며 빨라지는 속도 같은 것들이 있죠. 어차피 우린 계속 걸을 텐데 어떻게 더 많은 것을 다양하게 느끼며 걸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거예요. 눈을 감고 걷기도 하고, 소리에 반응해서 걷기도 하고, 타인의 걸음을 따라 걷기도 하며 걷는 감각을 깨워보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 걷는 일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네요.


걷는 일을 통해 다양한 감각을 깨울 수 있어요. 제가 그동안 배웠던 필라테스나 움직임 관련 수업 내용을 다 접목할 수 있을 만큼 걷는 일은 복합적이에요. 지속가능한 걷기를 다른 사람에게 제안하려면 이야기가 필요해요. 그래서 뇌과학적인 관점이 드러난 책을 찾거나 테라피 같은 학문을 공부하면서 설득력을 갖추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요즘은 어디를 자주 걸어요?


흙이 있는 데를 걸으려 해요. 주로 집 근처인 서울숲을 걷죠. 원래도 이런 의외의 공간을 좋아해요. 서울에서도 가장 분주한 동네, 그 동네에 있는 숲. 몹시 시끄럽다가 갑자기 공간이 분리된 것처럼 조용해요. 특별한 공간이죠.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 시간에 걷는 걸 선호해요. 제 공간이 커지는 것 같아서요.


공간?


사람이 걸을 때 캡슐처럼 작은 공간이 따라 움직이는 걸 느껴본 적 없나요? 앞, 뒤, 양옆으로 내 존zone 이 분리되잖아요. 아무리 좁은 산길에서도 그 공간은 침해하지 않고 서로 피해 가잖아요.


부딪히지 않는 걸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군요. 각자의 캡슐 안에서 걷는 사람들과 ‘수혁 존’을 상상하니 귀여워요. 도시에서 걷는 것과 산에서 걷는 일은 다른가요?


산에서 걸을 때는 도시에서보다 겸손해지죠. 오르막길을 오를 땐 바닥을 보게 되잖아요. 도시에선 앞을 보고 걷는 것과 다른 태도가 돼요. 리듬감이 잦아들고 차분해지고요.


그럼 달리는 것과 걷는 것도 다른가요?


달리는 때는 리듬감이 커져요. 천천히 걷는 동안에는 발이 바닥을 닿는 느낌과, 귀로 들려오는 소리와, 코로 들이키는 공기, 스치는 온도 같은 감각을 최대치로 받아들인다면, 뛸 때는 빠른 속도를 이용해서 그 감각을 경쾌하게 만들 수 있어요.






SNS에 올라오는 짧은 영상들 재밌게 봤어요. 마지막에 꼭 춤을 추던데, 무슨 의미예요?

느낀 점을 영상으로 담고 자연스럽게 춤을 추며 마무리해요. 뭔가 해냈다는 즐거움의 표현이에요. 정해진 안무가 아니라 막춤이잖아요. 몸이 가진 리듬을 온몸으로 표현해 보는 거예요.


직업인 필라테스도 궁금해요. 필라테스의 리듬은 수혁 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나요?


처음에는 필라테스를 건강하게 돈 벌 방법으로 활용했어요. 지금은 생각이 확장되었어요. 유동적이고 유기적으로 계속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건강하다는 생각이거든요. 필라테스는 걷고, 뛰고, 춤추고, 움직이는 건강한 삶의 일부에요. 요즘은 필라테스보다 맨몸운동에 관심이 많아요. 팔굽혀펴기나 스쾃 같은 거 말고 내 몸과 흐름을 이해하면서 하는 운동이요. 몸을 이해할 수 있으면 이후에 나머지 움직임은 다 같은 맥락이에요. 몸이 가는 방향, 그 흐름을 이해하면 필라테스, 헬스, 수영, 축구 등 모든 운동을 다 다치지 않고 잘할 수 있어요.


몸을 키우고 만드는 것보다 몸의 흐름을 이해하는 게 부상 방지에 더 효과적일 수도 있겠네요.


맞아요. 몸이 커지고 단단해지면 힘은 셀 수 있지만, 그게 기능적으로 더 뛰어나단 것은 아니에요. 몸의 흐름을 아는 건 부상을 피하는 방법이 되죠. 다치는 찰나의 순간에 몸의 중심과 방향을 알아차린다면 덜 다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넘어지더라도 바닥에 얼굴이 먼저 닿느냐, 팔꿈치가 먼저 닿느냐에 따라 부상의 정도가 달라지잖아요. 같은 팔꿈치로 떨어지더라도 곡선과 흐름을 만들어 착지하면 몸을 보호할 수 있어요.


이전 연구원으로 일한 것보다 필라테스 강사 생활이 더 길죠?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는 없나요?

한 달에 한 번 정도 있어요. 몇 년이 지나도 지금까지 기억나는 월급날, 25일. 그날뿐이에요. 그보다 많았다면 회사로 돌아갔겠죠. 그렇지 않으니 계속해서 필라테스를 가르치고 있어요.


저도 얼마 전부터 25일에 월급이 나오는 회사에 다니고 있어요. 사무실에 해가 안 들어서 시간이 안 느껴져요. 창문도 없고 시계도 없어서 사람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쇼핑한다는 백화점처럼요. 도시에서 수혁 님이 계절과 날씨를 적극적으로 느끼는 방법이 궁금해요. 계절 스포츠를 즐긴다거나.

딱히 계절에 맞춰 뭘 하진 않는 것 같은데요.


계절밥상 이런 건요?


없어요. (웃음) 대신 좋아하는 걷기를 통해 계절감을 느껴요. 눈 내리면 눈밭을 걷고 비 오면 물이 고인 웅덩이를 걷고 신발이랑 양말까지 벗고 맨발로 걸으면 계절을 몸으로 느낄 수 있어요. 기지개도 한번 쭉 펴고요.



기지개 켜는 법을 알려주세요.


쉬워요. 두 팔을 벌리고 가슴은 하늘을 보고 우주의 기운을 받아들이면 돼요. 호흡은 깊게 들이쉬고.


이렇게 공기가 찬 날에도 호흡을 크게 들이쉬는 게 좋나요?


크게라는 표현보다 그날의 상태에 맞춰 깊게 하는 게 좋아요. 추워도 숨은 쉬어야 하잖아요. 배경과 상황에 맞춰 계속 움직이는 게 좋아요. 몸은 안 쓰면 굳거나 붓고 기능적으로 퇴화하거든요. 춥다고 움츠리는 것도 좋지 않아요. 덥다고 손부채질을 하는 게 더 몸을 덥게 하는 것처럼 춥다고 웅크리고 있는 일이 더 몸을 차갑게 만들어요.


그럼 추워서 마음이 움츠러들 때는요?


밖의 날씨가 차갑고 해가 짧아져 기분이 울적할 수 있죠. 그걸 ‘오늘은 날이 춥네.’라고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대하세요. ‘나 지금 기분이 우울하네.’ 하고요.


그게 다예요?


네. (웃음) 우리가 주변에 “힘내”라는 표현을 자주 하잖아요. 근데 그 말 듣는다고 힘 안 나거든요. 사람마다 회복에 드는 시간과 속도는 달라요. 남이 힘내라고 얘기해주는 것보다 자기가 오늘은 힘이 없단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중요해요. ‘힘이 안 나네. 오늘은 힘이 나지 않는 날이네.’ 이렇게요.






인스타그램에 우울하다고 올린 게시물을 봤어요.

맞아요. 그날 우울해서 그렇게 썼어요. 우울한 감정을 인정하고 이해하면서 ‘불안함도 응원해’라고 썼죠.


수혁 님은 어떤 때 우울해요?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데, 공부하고 싶은 것들이 생겨 일을 줄였어요. 하던 일이 적어지면서 활동량이 줄어드니 우울해지더라고요. 그런 때 우선 내 상태를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업로드했어요. 건강하려면 표현해야 해요. 핑크색 양말을 신는 것이든, 기지개를 크게 펴는 일이든, 우울하다고 말하는 글이든 요즘 내가 걷는 이유에 관한 대화든 표현해야 잘 살 수 있어요.








"같이 움직이고 삶을 느끼고 싶어요.
살아 있는 게 곧 삶이니까요."








인스타그램 해시태그로 사용하는 ‘#릴릴한라이프’ 는 무슨 뜻이에요?


‘Life is live, Live is life’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들었어요. 삶은 살아있는 것이고 살아 있어야 삶이라는 뜻이에요. 앞으로 다른 사람들이랑 건강하고 다양한 표현을 같이 해보고 싶어요. 요즘 말로 크루 같은 걸 만들어서.


맨발 걷기 모임 운영했잖아요.


사람 모집이 어려워서 중간에 힘이 빠졌어요. 지금 생각으로는 전국 맨발 걷기 지도를 만들어 보고 싶어요. 지역별로 맨발로 걷기 좋은 루트를 찾아다니는 거죠. 같이 움직이고 삶을 느끼고 싶어요. 살아 있는 게 곧 삶이니까요.




인터뷰와 글, 조서형 에디터

사진과 영상, 심예림 작가






OU STORYBOOK Issue N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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