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윤은 다이버다. 아득하고 낯선 바다에 거침없이 뛰어들어 유유히 헤엄친다. 깊어진 물 아래에서는 바깥의 복잡한 소리가 더 들리지 않는다. 엄마와 둘이 서 있던 그 자리에 홀로 남았지만, 그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가뿐하고 또 단단하다.
김성윤 @lovescuba_kayla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 정말 이야기 나누고 싶었어요.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제가 감사하죠.
바닷속에서 일한다고 들었어요.
물 안에서 파이프를 조립하고, 배를 용접하는 산업 잠수를 하다가, 팔라우에서 다이빙 강사로 일하고 있었어요. 종종 하와이, 인도네시아도 오가면서요.
바다 아래는 어떤가요?
바다를 사랑하고 좋아하지만, 그걸 떠나서도 진짜 경이로워요. 마치 우주 같아요. 자연 앞에선 아무것도 마음처럼, 의지대로 되지 않아요. 때로 센 조류에 사람이 죽기도 하는 바다에서 일하다 보면 수시로 느껴요. 사람은, 나란 존재는 한낱 미물이라는 걸.
코로나 사태로 귀국한 거예요?
마침 비자도 만료되고, 아파트 재계약 문제도 있어서 한국에 들어와 있었어요. 작년 2월이 마지막 투어였어요. 제가 다녀온 직후에 그 장소가 폐쇄되었는데, 그렇게 된 지도 벌써 일 년이 지났네요.
한국에 이렇게 길게 머문 건 오랜만이겠어요.
4년 만인 것 같아요. 대학을 졸업하고는 한국에서 쭉 직장 생활을 했거든요. 2013년에 일을 그만두고서 호주에 다이빙하러 갔고, 자격증 취득을 위해 한국에 들어왔다가 다이빙 강사로 해외에서 일한 다음엔 처음이에요.
직장 생활을 했었군요. 어땠어요? 패션 회사 MD로 8년 차를 앞둔 평범한 회사원이었어요. 회사 다니는 건 뭐, 힘들었죠. 갚아야 할 빚이 있었거든요. 그 숙제를 마친 다음에 회사를 그만뒀어요. 그리고서 취미였던 다이빙을 원 없이 했죠.
혹시 고향이 바닷가인가요?
아니요. 전 서울에서 태어나서 쭉 여기서 자랐어요.
오. 어떤 서울 아이였을지 궁금하네요.
컸어요(웃음). 태어날 때부터 4kg이 넘는 우량아로 내내 키도 크고 몸도 큰 아이였어요. 우유도 두 통은 먹어야 잠들고, 이유식도 남들 두 배로 먹었어요. 쌍둥이 키운 만큼 식비가 들었다고 엄마가 얘기해줬어요. 반면 말이 늦었대요. 또래보다 뭐든 빨랐던 영재 언니를 키우다 절 키우느라 엄마가 걱정이 많았죠. 얘가 커서 뭐가 되려나, 먹고는 살 수 있을까(웃음). 자라면서는 얌전, 차분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머리는 늘 짧았고, 활발했고, 공부보다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학교가 끝나면 밖에서 지칠 때까지 뛰어놀았어요. 손가락 사이사이에 잠자리를 끼운 채 집에 오던 기억이 지금도 나요. “엄마~ 나 왔어!” 하면서 7~8마리의 잠자리를 동시에 놓아줬어요. 푸르륵 잠자리가 날아오르면, 엄마가 이런 짓 좀 하지 말라며 기겁을 했어요. 집에서 키우고 싶어서 매일 그렇게 잡아 온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니 잠자리도 꽤 잘 잡던 아이였네요.
어떤 분위기였는지 상상이 갈 것도 같네요. 혹시 장래 희망이 경찰? 소방관?
오, 아니요. 의외로 디자이너였어요(웃음). 지금은 인터넷도 있고, 유튜브도 있어서 직업의 종류가 다양하단 걸 아이들도 알지만, 예전엔 아니었잖아요. 장래 희망 그려서 학교 게시판에 붙여두면 선생님, 과학자, 축구선수, 그 옆에 또 선생님, 이런 식. 하루는 숙제를 하려고 스케치북을 펴서 엄마한테 물어봤어요. “엄마, 나 무슨 꿈 그릴까?” 엄마는 제가 그림을 잘 그리고 꾸미는 거 좋아하니까 ‘디자이너’를 해보라고 추천했어요.
세련된 장래 희망이네요.
뭔지 잘 모르면서 디자이너가 되어야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매해 희망 직업란에 디자이너라고 쓰다가 미술 전공을 했어요. 제가 일찍 예쁜 거에 눈을 뜬 건 당연했어요. 엄마가 워낙 멋쟁이였거든요.
엄마 옷 중에 기억나는 거 있어요?
패턴을 좋아했어요. 예전에 저런 옷을 어떻게 구했지, 싶은 특이한 옷도 자주 입었고요. 마음에 드는 천이 있으면 떼어다가 직접 만들어 입기도, 우리한테 입히기도 했어요. 사진을 보면 언니랑 제 꽃 원피스도 엄마가 만든 거고, 본인 옷도 바지까지 세트로 만들어 입은 거예요. 지하철이나 버스 타서 보면 사람들이 다 어두운 계열 옷을 입고 있잖아요. 엄마랑 전 그걸 잘 이해 못 하는 사람이에요. 호피, 땡땡이, 꽃무늬처럼 예쁜 패턴이나 화려한 컬러가 세상에 얼마든지 있는데, 왜? 하면서요(웃음). 대학교 때는 선배들한테 불려간 적도 있어요. 왜 그렇게 튀게 입고 다니냐고 한 소리 들었어요. 한참 우아한 청담동 며느리 룩이 유행할 때라 더 그렇게 느껴졌던 거겠죠?
지금 청바지에 흰 티 차림이라 그럴까요? 대학생 때 불려간 게 상상이 잘 안 돼요.
머리를 땋아 드레드도 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색깔 맞춰서 입고 그랬어요(웃음). 한껏 멋 부리고 다녀서 ‘똥째쟁이’라던지 ‘깔병 걸렸다’고 친구들이 놀렸던 기억이 나요. 반면 엄마는 한 번도 뭐라고 안했어요.
취향 존중인가요?
워낙에 엄마가 쿨했어요. 하면 하는 대로,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네 인생이니까, 하고 편하게 생각해 줬거든요. 그래서 고민이 생기면 거리낌 없이 엄마한테 다 얘기할 수 있었어요.
조언을 듣든 안 듣든 선택은 제가 할 수 있었으니까요. 엄마랑 친구들이랑 다 같이 놀기도 했어요. 엄마가 만든 음식 먹으면서 수다도 떨고, 소주도 마시고. 되게 좋았어요, 엄마랑 저.
목에 건 반지도 엄마가 주신 거라고요.
제가 고등학교 때 외할머니가 꼈던 반지라며 줬어요. 엄마도 엄마, 아빠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저랑 언니도 뵌 적이 없어요. 같이 있는 게 좋아서 늘 끼고 다녔어요. 얘기 한 번 나눠본 적 없는 외할머니지만, 괜히 소중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다이빙하면서는 잃어버릴까봐 줄을 사다 목걸이로 하고 다니고 있어요. 씻을 때도 안 벗어요. 엄마가 딸에게, 그 딸이 또 딸에게 준 백 년은 된 물건이잖아요. 제가 아이를 가지지 않더라도 조카한테 꼭 물려주려고요.
엄마랑 정말 가까운 사이었나봐요.
한 번은 엄마가 점을 봤는데, 언니 말고 제가 엄마를 보살피는 사주래요. ‘에이, 언니가 하겠지’, 막연하게 생각했었는데 진짜로 제가 마지막까지 엄마 병간호를 했어요. 아빠는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시고, 언니도 일찍 결혼했거든요. 엄마는 제가 대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엄마가 해 준 얘기 중에 지금도 곱씹게 되는 말이 있을까요?
처음 인터넷이 보급되던 때 엄마가 저한테 보냈던 이메일이 있어요. 메일함 정리하다가 오랜만에 다시 봤는데, ‘불평하지 말고, 좀 긍정적으로 살라’고 쓰여 있더라고요. 생각해보면 20대 초반에 제가 불만이 많았던 것 같아요. 게다가 엄마한테는 안 참고 다 말했으니, 대체 얼마나 투덜거렸을까요?
엄마는 반대로 힘든 상황이 있으면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어떤 일이 있어서 힘드니까 좀 도와달라고 말해도 될 것 같았는데도요. 시간이 지나고서 보니 굳이 말하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넘어갈 수 있는 일을 딸들과 나누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요? 아이는 없지만, 종종 엄마가 세상을 밝게 보려고 노력한 마음이 생각나요. 그래서 긍정적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고요. 엄마는 때로 긍정의 아이콘 같았어요.
엄마를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있었겠어요.
딸이라면 누구든 있지 않을까요? 엄마가 새 가정을 꾸리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어요. 사업을 시작하면서 친척들한테 돈을 빌리고, 은행에 가서 제 이름으로 도장도 찍게 했는데 사기를 당했어요. 새아빠인 분이 사기 전과가 있는 사람인 걸 알면서도 결혼을 하겠다고 하면서 생긴 일이라 주변 모두가 등을 돌렸어요.
그때 무슨 생각을 했어요?
아, 우리 엄만 왜 이럴까? 저랑 비슷할 때 아빠를 여읜 친구가 있었는데, 걔네 엄마는 그냥 마트에서 일하셨어요. 번 돈 조금씩 모아가며, 큰 욕심 안 부리고. 다 그냥 잘 사는데, 왜 우리 엄마만 이럴까? 원망스러웠어요. 그 무렵 엄마가 아팠어요. 병원에 있으면서 진짜 많이 싸웠죠. 환자는 아파서 힘드니까 짜증을 내고, 나는 그걸 못 참아 또 화를 내고. 저는 엄마를 엄마라 생각을 안 했던 것 같아요. 친구처럼 편하게 지낸 대신 말도 막 한 거죠.
지금은 어때요? 엄마도 잘해보려고 했던 거였구나, 생각해요. 간호하면서 진짜 미웠던 것 같은데, 지나고 나면 그런 게 하나도 생각이 안 나요. 친구들이 부모님 얘기하면서 투덜거리면 제가 듣고서 마지막에 덧붙이는 말이 있어요. 돌아가시고 나면 내가 못 해준 거밖에 생각이 안 난다고. 왜 그것도 못 참았을까, 왜 그것밖에 못 해줬을까, 그 생각만 남았어요.
언제 가장 엄마 생각이 나요?
돌아가신 지가 17년이 되었고, 제가 마흔 살이 되었는데도 아직 그때 멈춰 있어요. 길에서 50대분들을 보면 우리 엄마 같고, 아빠 같아요. 근데 아니잖아요. 나이가 들어 할머니가 된 엄마 모습이 잘 안 그려져요. 나중에 제가 죽어서 우리가 만나면 엄마는 50대 초반 얼굴 그대로일까 궁금해요. 지금도 언니랑 엄마 얘기하다 울기도 해요. 그래도 엄마가 말했잖아요, 긍정적으로 살라고. 시간이 많이 지나기도 했으니 티 안 내고 씩씩하게 지내려 해요.
엄마가 계셨다면, 성윤 님의 삶은 지금과 다른 모습일까요?
엄마가 있을 때까지만 해도 제 인생의 포커스는 ‘엄마랑 둘이 행복하게 잘 살아야지’ 였어요. 만약 그랬다면, 평범하게 회사 다니고, 도전은 좀 아끼며 대한민국 보통의 40대 삶을 살지 않을까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저는 혼자라고 생각을 해 왔어요. 동전의 양면처럼 좋고 나쁜 건 없는 것 같아요. 다만 지금 제 어깨엔 가족이란 무게가 없죠.
비교적 어깨가 가벼운 덕에 바닷속을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게 된 걸까요? 회사 그만둘 때 언니가 저보고 미쳤다고 했어요. 아무 생각이 없고, 제멋대로라고요. 그때 싸우고 1년 동안 연락을 끊기도 했어요. 어떻게 그렇게 모든 걸 놓아버릴 수 있냐고 말한 사람들도 있었죠. 그런 선택이 가능했던 건, 부모님이 안 계셔서가 맞는 것 같아요. 별로 남의 의견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어요. 그동안 빚 갚느라 고생했는데, 이제 하고 싶은 것 좀 하자는 마음이었어요.
팔라우에서 일하고 남는 시간에는 보통 뭘 했나요?
현지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어요. 물에 들어가서 총으로 물고기를 잡는 스피어 피싱이란 게 있어요. 팔라우에서 옛날부터 해왔던 사냥법이에요. 숨을 참고 돌 옆에 숨어 기다리다가 물고기를 쫓아다니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왕년에 스피어 피싱 대회에서 상을 탄 90대 할아버지랑 같이 잠수도 하고요. 되게 재밌었어요. 돈 좀 못 벌어도 그렇게 사는 게 좋았어요.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야지 생각했고요.
요즘에는 여가에 뭐해요?
요즘은 남는 시간 없이 일해요. 한국에 오고 나니까 또 여기 환경에 적응하더라고요. 살도 진짜 많이 쪘어요. 3일, 5일짜리 단기 다이빙 코스를 가르치고 웹 디자인 일도 받아서 하고, 크라우드 웍스라고 호주에 있을 때부터 하던 부업도 계속하고 있어요. 인공지능에 데이터를 심어주는 일명 ‘디지털 인형 눈알 붙이기’ 같은 거예요. 유튜브를 시작하려고 학원을 두 번이나 다녔어요. 컴퓨터도 바꾸고 필요한 기기도 다 샀어요. 일에 밀려 시작도 못 하고 있지만요. 완전히 풀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사는 일이 깃털처럼 가벼워지지는 않네요.
완전히 풀어지지 않도록 잡고 있는 건 무엇일까요?
부모님이 안 계셔서 어깨가 가볍게 느껴진 건 맞지만, ‘아빠가 없어서~’ 로 시작되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아서, 또는 엄마가 하늘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같은 이유로 책임감을 느끼는 건 아니에요. 그런 걸 떠나서 뭔가가 있어요. 회사 그만둘 때도, 잠수 배울 때도, 팔라우에서 일할 때도 ‘야, 어떻게 하려고 그래?’ 라던지 ‘행복한 건 알겠는데, 언제 돈 모아서 시집갈래?’라고 말하는 사람은 주변에 늘 있었어요. 저는 이제 포커스가 저에게 맞춰져 있어 그런 이야기랑은 상관없이 제 삶을 사는 방법을 배웠어요.
예전에는 꼭 행복해질 거라고 자주 말하고 다녔어요. 그땐 행복이란 걸 잘못 생각한 것 같아요. 속세를 떠나 작살로 물고기 잡아먹고 과일 따 먹으면서 행복을 찾는 상상을 했거든요. 진짜 섬에서 헤엄치고 물고기 잡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제가 배운 행복은 현재에 있어요. 지금 당장 여기서 행복하지 못하면 영원히 행복을 찾을 수 없어요. 아니, 가만히 맹하게 있으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앞으로 걸어가야죠. 다만 한 걸음, 한 걸음 행복을 충분히 느끼면서 걸을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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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와 글, 조서형 에디터 사진과 영상, 정현우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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